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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영화

영웅 : 천하의 시작_무협영화가 예술로 승화한 작품인 최고의 걸작 (장예모 연출, 색채 상징, 중화 사상)

by 두목73 영화창고 2026. 5. 31.

무협 영화를 좋아한다고 했을 때 가장 먼저 뭘 기대하십니까? 화끈한 액션, 빠른 전개, 짜릿한 결투 장면. 그런데 저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한동안 멍하게 앉아 있었습니다. 액션 때문이 아니라, 색 때문에. 어릴 때부터 고대 문명과 역사에 빠져 한때 고고학자를 진지하게 꿈꿨던 저에게, 영웅: 천하의 시작은 단순한 오락 영화로는 도저히 분류할 수 없는 작품이었습니다.

영웅 : 천하의 시작

장예모 연출이 만든 색채

장예모 감독은 세계 3대 영화제인 칸, 베를린, 베니스를 모두 석권한 감독입니다. 여기서 세계 3대 영화제란 국제 영화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세 축제를 일컫는 말로, 이 세 곳을 모두 제패한 감독은 전 세계적으로도 극히 드뭅니다. 그런 그가 처음으로 도전한 액션 무협 대작이 바로 영웅: 천하의 시작이었습니다.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먼저 압도당한 것은 액션이 아니라 색채 연출이었습니다. 당시 아시아 영화 사상 최대 제작비가 투입되었고, 6,500명의 엑스트라가 동원되었다는 사실보다 솔직히 더 인상적이었던 것은, 같은 사건을 다른 색의 의상과 배경으로 반복 서술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이 영화에서 색채 상징이란 단순히 화면을 예쁘게 꾸미는 장치가 아닙니다. 쉽게 말해, 색 하나하나가 인물의 심리 상태와 이야기의 진실 여부를 시각적으로 코딩하는 내러티브 도구입니다. 영화는 빨강, 파랑, 초록, 흰색, 검정 총 다섯 가지 색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며, 각 색이 담고 있는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 파랑: 조화, 신뢰, 우정, 차가움
  • 초록: 자연, 평화, 순응, 조화
  • 빨강: 사랑과 증오의 양면
  • 흰색: 청결함, 진실, 중립, 완벽함
  • 검정: 힘과 권력, 시작과 종말, 죽음과 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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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색채 상징의 세계

저는 처음 볼 때 이 의미를 모르고 봤는데, 두 번째 볼 때 색의 맥락을 의식하며 보니 완전히 다른 영화처럼 느껴졌습니다. 특히 흰색 파트에서 이연걸과 양조위의 대결 장면은 지금 생각해도 소름이 돋습니다. 흰색이 진실과 중립을 상징한다는 걸 알고 나서야 그 장면이 단순한 결투가 아니라는 게 보였습니다.

미장센(mise-en-scène)이라는 개념을 아십니까. 미장센이란 카메라 앞에 배치된 모든 시각적 요소, 즉 의상, 조명, 소품, 배우의 동선까지 포함한 화면 구성 전체를 일컫는 영화 용어입니다. 장예모는 이 미장센을 색채와 결합해 단순한 볼거리가 아닌 의미의 층위를 만들어냈습니다.  오우삼 감독의 영웅본색이나 첩혈쌍웅의 미장센과는 또 다른 완전 새로운 개념이었습니다. 중국 개봉 당시 주요 일간지들이 "색채와 이미지의 향연"이라는 평가를 쏟아낸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중화사상 논란, 불편함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이 영화를 두고 "예술 작품이다"라고 극찬하는 분들도 있는 반면, 저는 처음 봤을 때 영화가 끝나고 약간 불편한 감정이 남았습니다. 영상은 아름다운데 메시지가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 핵심은 결말부에 있습니다. 암살자인 무명이 진시황을 암살하지 않기로 결심하는 이유가 "천하의 평화"를 위해서라는 것인데, 이 논리는 약소국이 강대국에 흡수되는 것을 정당화하는 중화주의의 논리와 구조적으로 겹쳐 보입니다. 중화주의란 중국 중심의 세계관으로, 중국 문명이 주변 국가보다 우월하며 주변국의 복속은 질서를 위한 당연한 귀결이라는 사상입니다. 이런 시각에서 본다면 양조위와 이연걸이 연기한 협객들의 선택이 단순한 희생의 서사가 아니라, 특정 국가 이념을 미화하는 구조로 읽힐 수 있습니다.

당시 이 영화가 중국 정부의 이례적인 지원을 받아 군대까지 동원됐다는 사실을 알고 보면 이 불편함은 더 구체화됩니다. 물론 "감독이 정치적 의도를 가졌을 것이다"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장예모 감독이 의도적으로 정치 선전을 목적으로 했다고 단정하는 시각도 있지만, 그것과 별개로 작품이 특정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분석은 충분히 유효합니다. 내러티브 구조(narrative structure) 측면에서도 이 영화는 흥미롭습니다. 내러티브 구조란 이야기가 어떤 순서와 방식으로 전개되는지를 가리키는 개념입니다. 영웅은 같은 사건을 여러 인물의 시각으로 반복 재구성하는 라쇼몽 기법을 활용합니다. 라쇼몽 기법이란 하나의 사건을 복수의 화자가 각각 다른 방식으로 진술하면서 진실이 무엇인지 관객 스스로 판단하게 만드는 서술 방식입니다. 이 구조 덕분에 영화는 단순한 영웅담이 아니라 "진실이란 무엇인가", "개인의 신념과 국가의 논리는 어떻게 충돌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게 됩니다.

 

제 경험상, 영화를 예술 작품으로 감상하는 것과 그 안에 담긴 메시지를 비판적으로 읽는 것은 동시에 가능합니다. 이연걸의 절제된 연기, 장만옥의 존재감, 양조위의 깊이 있는 표정 연기는 어떤 이데올로기적 논란과 무관하게 독립적인 감동을 줍니다. 이 영화가 아시아권 영화를 세계 시장에 알리는 데 기여한 것도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영웅: 천하의 시작은 제가 이연걸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기억하는 작품입니다. 역사와 고대 문명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전국시대라는 배경 자체도 충분히 흥미롭게 느껴지실 겁니다. 다만 메시지에 대해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기보다, 화면이 아름다울수록 그 안의 논리를 더 꼼꼼히 들여다보는 것이 이 영화를 제대로 즐기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직 안 보신 분이라면, 한 번은 색의 의미를 모르는 채로, 두 번은 색의 의미를 알고 나서 보시는 걸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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